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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횡설수설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위대한 발명들」

by fermi 2005. 3. 28.
읽어보니 매우 흥미로와서 옮겨담았습니다.

출처는 LG상남도서관 뉴스레터 입니다.


제목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위대한 발명들」
  


첨단 산업계는 아이디어 하나가 10억달러의 가치로 돌변하기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항상 만들어낸 당사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지난 50년 동안 가장 중요했던 기술들 중 일부인 트랜지스터, 관계형 데이터베이스(RDB), 그리고 마이크로프로세서 등과 같은 기술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기술 개발자들에게 대박을 터트려주지 못했다.

몇몇 개발자들은 통찰력 부족으로 자신들의 주도권을 잃어버린다. 때로는 기업의 정치적인 상황도 한 몫을 차지하기도 한다. 더 흔한 경우는 단지 타이밍이 맞지 않아 기술에 대한 보상이 지연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드라이브가 현재 팔리고 있는 대다수 MP3 플레이어에 사용된다고 생각해보라. 마이크로드라이브는 세계가 아이팟과 같은 제품에 대비하기 훨씬 이전에 개발됐다.

그러나 여전히 연구 개발 분야에 사용되는 수십억달러의 자금은 최소한 몇몇 첨단기술 업체들에게는 보상을 돌려주고 있다. 여기 잘못 진행돼 기회를 잃어버린 주목할 만한 개발 사례들이 있다.

1. 트랜지스터
1947년, AT&T 벨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세계 최초로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발명해냈다. 이 중 3명은 훗날 이 발명으로 물리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했다.

벨 연구소는 실리콘 트랜지스터에 대한 특허를 획득했으나 미 정부와의 반독점법 문제를 피하기 위해 IBM,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그리고 소니의 전신 등에 라이선스를 부여했다. 1956년의 허용 결정을 통해, AT&T는 트랜지스터를 무료로 라이선스하는 데 동의했다.

특허 컨설턴트인 리차드 벨가르드는 “현재 트랜지스터 사용량은 거의 수조 개에 달한다”라고 말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196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이 특허는 컴퓨터 혁명이 오기 수년 전에 소멸됐다는 것이다. 반면 AT&T는 1980년대 중반까지 유선전화 분야에서 독점을 유지했다.

AT&T는 거의 위대함에 가까운 개가를 연속해서 올렸지만 설명하기가 상당히 난해하다. 이 회사는 유닉스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그 분야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올라서지 못했다. 또한 80년대에는 비록 후발주자로써 이동통신 분야에 진입하긴 했지만 라이선스를 소유할 기회를 놓친 적이 있으며 또한 PC 사업으로의 확장도 진행한 바 있다.

2. 월드 와이드 웹
90년대 초로 돌아가보자. 핵연구유럽기구(EONR), 또는 CERN이라 불리는 기관에 소속된 로버트 칼리어는 연구소의 월드 와이드 웹(WWW) 프로젝트에 펀딩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벤처 캐피털리스트인 스벤 링재르데와 접촉했다. 현재 비전 캐피털의 공동 창업 파트너인 링재르데는 당시만 해도 스위스 회사인 제네베스트에 재직하고 있었다.

링재르데는 이메일로 “당시 프로젝트의 규모가 더욱 커지게 되자 비용 또한 더 많이 필요하게 됐다. 따라서 CERN의 고위 임직원들은 WWW 프로젝트가 체계적인 연구에 직접 관련돼 있지도 않으면서 너무 많은 비용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며 예산 삭감 결정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자금을 투여할 지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강력한 미국 벤처 캐피털이 합류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즈니스 모델 또한 불투명했다”라고 덧붙였다.

링재르데는 2명의 잘 알려진 미국 벤처 캐피털리스트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다. 첫 번째 사람은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응답하지 않았다. 링재르데가 5페이지 분량의 팩스 메시지를 보낸 두 번째 사람은 관심을 가졌으나 “인터넷으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물론, 몇 년 후에는 둘 다 거대한 인터넷 후원자가 됐다.

여전히 링재르데가 지적하는 것처럼 당시 시장은 불투명해 보였으며 그 이후 모든 이들이 불확실성을 조금씩 덜어내기 시작했다. 아울러 만약 처음부터 상업적이었다 해도 인터넷이 얼마나 더 빠르게 확산됐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3. 온세일
제리 카플란은 그의 저서 “스타트업 : 실리콘 밸리 어드벤처”에 기록된 펜 기반 컴퓨팅 기업인 GO 컴퓨팅을 운영하는 와중에 7500만달러를 날려 버렸다. 하지만 1994년 그는 초기 온라인 경매 기업 중 하나인 온세일을 공동 창업했다. 클라이너 퍼킨스 커필드와 바이어스에 의해 지원받으며 이 회사는 곧 시장 선도 업체가 됐다.

카플란은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진 것 같다”라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천국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95년 이베이(eBay)가 탄생한 것이다. 몇 년 후 온세일은 에그헤드(Egghead)와 합병했으며 여러 개로 분할돼 경매 처분됐다.

카플란은 “모델을 정확히 구현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체제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이베이는 서로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대상인 포럼을 만들었다. 반면 온세일은 남은 것들을 경매 처분하는 데 특화됐다. “이것은 양사간의 근본적인 차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에그헤드와 합병하기 이전까지 상당히 많은 벤처 기금이 온세일로 유입됐다. 온라인 소매업자들은 “제품을 1달러에 구매해 95센트에 팔고 있었다. 규모 면에서 차이를 만들려고 애쓰면서 말이다”라고 그는 농담조로 말했다.

카플란은 여전히 온세일이 성공 사례 중 하나로 꼽힐 수 있다는 데 동조하고 있다. 이 회사의 분기별 수익은 일부 기간에 거의 1조달러를 육박한 적도 있다. 이베이 또한 결국 이 회사 특허 중 일부를 구매했다.

카플란은 현재 붐의 시대를 픽션화한 사례를 다룬 “로켓 여행”이란 책을 저술했으며, 출판업자를 물색하고 있다. 그는 또한 윈스터(Winster)라는 게임 회사를 새로 출범시켰다.

4. 실리콘 나노와이어
얇은 실리콘 필라멘트인 실리콘 나노와이어는 충분히 향후 수십 년 동안 칩 산업계에서 체계적인 기술이 될 수 있었다. 물론 AT&T 벨 연구소에 의해 처리된 기초적인 특허들은 1964년 처음 발간됐으며 실제 시장이 진화하기 수년 전에 소멸된 바 있다.

아무튼, AT&T가 이 발명에서 많은 이득을 얻지 못한 유일한 나노 개척자는 아니다. NEC는 1991년 단일 벽을 지닌 나노튜브를 개발했다. 비록 이 회사가 활발히 자신의 특허를 라이선스하고 있지만, 초기 특허들은 대략 2008년에 만료된다.

나노튜브 산업은 단지 막 불이 붙기 시작한 단계며, 또한 이 기술은 2010년 이후까지 전자 시장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한 주요 반도체 제조업체 중역은 익명성을 전제로 특허 시한이 종료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IBM은 또한 거의 동시에 체계적인 나노튜브 특허를 방어하고 있다.

5. 부시콤 프로세서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인텔 4004는 1971년 첫 선을 보였다. 칩에 대한 권리는 아무튼 초창기 부시콤이라 불리는 일본 계산기 제조업체에게 속해 있었으며 이 업체는 1969년에 인텔이 이를 구축하도록 위탁했다.

칩이 나올 때까지 계산기 가격은 떨어졌으며 부시콤 또한 가격 인하를 원했다. 인텔은 자사가 기술적으로는 3개 칩의 번들인 4004를 계산기 시장 외부로 판매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동의했다. 부시콤도 여기에 동의했다.

여전히 이 개발물이 시선을 끌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인텔의 앤디 그로브 회장은 지난 2001년 인터뷰에서 “나는 이것이 인텔에게 미래를 준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처음 15년 동안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인텔을 정의하는 사업 영역이 됐다. 하지만 초기 10년간 우리는 이를 지엽적인 것으로 봤다. 이 사례만 보더라도 아무 것도 못 되는 지엽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6.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IBM 엔지니어들은 다른 기술들 중에서도 HDD와 RISC 칩, 그리고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 등을 개발해 낸 것으로 신뢰를 받을 만하다. 이 회사는 지난 10년 동안 10명의 경쟁 기업들을 합친 것보다 많은 수인 2만 2000여개 특허를 초월하는 성가를 이뤄냈다.

하지만 IBM은 모든 발명품들을 시장에 성공적으로 소개하지 못했다.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를 예로 들어보자.

에드가 코드라는 한 젊은 IBM 엔지니어가 지난 60년대와 70년대에 관계형 데이터베이스의 개념과 구조를 정의했다. 그가 고안한 혁명적인 아이디어는 데이터를 행과 열의 테이블로 조직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데이터를 다른 테이블로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코드의 작업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구축의 청사진뿐 아니라 데이터 액세스의 표준 방법인 SQL(Structured Query Language)의 구성에 대한 기초까지 산출해 냈다.

아무튼 이 기술은 닷이 IBM의 기업 전략에 맞물리진 않았다. IBM은 비교적 오래된 데이터베이스 모델에 대규모로 투자하고 있었다. 그 결과 IBM은 1978년까지 코드의 아이디어에 기반한 제품을 출시하지 못했으며 이 때는 이미 래리 엘리슨이라 불리는 젊은 사업가가 오라클을 설립한 한 해 후였다. 오라클은 135억달러의 시장인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에서 현재까지 리더로 자리잡고 있다.

7. 도스
MS가 운영체제에 뛰어든 건 사실 우연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러나 이 얘기는 IBM과 함께 시작한다.

IBM은 자사의 최초 PC에서 원래 디지털 리서치의 C/PM 시스템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리서치가 미발표 협약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IBM은 MS에게 IBM용 애플리케이션인 MS-DOS를 개발해 달라고 요청했다.

뭐 어쨌든, MS-DOS는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트(SCP)의 팀 패터슨이 만들어낸 운영체계인 QDOS에 실질적인 기반을 두고 있었다. MS는 IBM과의 계약을 모르고 있던 SCP로부터 QDOS를 5만달러에 인수했다.

바로 이 인수계약이 MS 제국의 기초가 됐다. 이후에 패터슨은 임시로 MS에서 일하기도 했다.

8. SGI, 크레이 인수
SGI가 1996년 크레이(Cray)를 인수했을 때, 이 회사는 실리콘 밸리의 '거인' 중 하나였다. SGI 간부들은 빌, 힐러리 클린턴과 어울렸으며 이 기술은 “주라기 공원”과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배경이 됐다.

하지만 SGI는 당시 이 기업의 한 부분을 인수하는 데 실패했다. 바로 이 부분이 울트라스팍(UltarSparc) 프로세서를 사용한 UE10000 서버였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대신 이 분야를 인수해 E10000라인으로 변환시켰으며 이 서버는 썬이 하이엔드 시장에서 IBM에 직접적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유닉스 서버 제품군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잡았다.

썬은 부분적으로 시스템의 우수함에 힘입어 닷컴 시절에 탁월한 위치로 도약했다. 썬의 서버는 보통 100만달러 이상의 가격에 팔려나갔다.

이와 동시에 SGI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시장의 주변부로 주저앉고 말았으며 넷스케이프, 구글 등 다른 신생기업들에게 사무실을 제공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9. 야후, 구글을 지나치다
대부분의 기술 합병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지만 이미 구축된 기업이 이후의 커다란 골칫거리를 피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들은 있다. 구글은 1998년 스탠포드 대학 엔지니어링 연구소의 프로젝트였으며 이때 창업자들은 야후 공동창업자인 데이비드 필로에게 내용을 보여줬다. 구글에 따르면 필로는 이 기술이 완전히 개발되고 확장성이 있을 때 논의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야후는 심지어 구글을 인수할 기회도 있었다.

현재 구글은 야후의 가장 큰 경쟁자가 됐다. 그러나 야후가 구글 인수에 뛰어들지 않았던 점은 다소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하다. 그 당시 검색 분야는 흘러넘치는 영역이었다. 스탠포드대는 초기 투자자를 찾는 데 있어 그다지 행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야후는 아무튼 홀로 고고하게 가지많은 않았다. 이 회사는 1990년대 중반에 넷스케이프에 헛되이 자신을 제공했다.

10. 마이크로드라이브와 HDD 기반 MP3 플레이어
IBM은 1인치 직경의 원반형 물체인 미니 하드드라이브인 ‘마이크로드라이브’라 불리는 개발품을 지난 1999년 선적하기 시작했으며 기업 고객들이 앞다퉈 달려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판매는 현실화되지 않았으며 50년대에 HDD를 개발했던 IBM은 이 분야에서 손실을 보기 시작했다. HP 또한 90년대에 소형 드라이브를 선보였지만 없애버렸다.

애플 컴퓨터의 아이팟은 2002년까지 초고속으로 진행됐으며 IBM은 HDD 사업부를 히타치에게 무턱대고 넘겼다. 2003~2004년 아이팟 미니와 다른 MP3 플레이어들이 미니 드라이브를 뜨거운 인기의 ‘필수품’으로 만들었다.

히타치 글로벌 스토리지 테크놀로지(HGST)의 제품 전략·마케팅 담당 수석 부회장이며 이전 IBM 임직원이었던 빌 힐리는 IBM이 소비자를 보지 못했다며 “히타치는 일본의 GE다. 이들은 밥솥, 냉장고, 원자력 발전소 등을 만든다”라고 말했다.

그럼 IBM의 사업부 매각이 잘못이라고? 히타치는 HDD를 판매하는 데 있어서 행운이 따른 경우지만 이 사업은 여전히 악명 높은 경쟁 환경에 둘러싸여 있으며 쉽게 이익을 올릴 수 없다. 또한 IBM과 달리 히타치는 이 시장에서 다수의 경쟁자들과 맞닥뜨렸다.

다소 관계가 있는 사실로 컴팩, 델 등 몇몇 기업들은 애플 이전에 HDD 기반 MP3 플레이어를 출시한 적이 있다. 아무튼 이 제품들은 PC용 표준 HDD를 탑재한 가정용 시스템이었다. 2001년 1월에는 이 분야의 미래가 상당히 유망해 보였지만 2001년 10월, 애플이 몇몇 제조업체들의 관심을 끈 고급형 1.8인치 HDD를 탑재한 아이팟을 선보였다. 휴대성이 승리했으며 게임은 끝났다.

11. 제록스 PARC
자, 이제 그 유명한 PARC에 시선을 맞춰보자. 여기서는 아무것도 볼 게 없다. 제록스는 데스크톱 PC, 이더넷 네트워킹, 레이저 프린터, 그리고 마우스 등과 같은 개념을 만들어냈지만 무자비하게 약탈을 당했다. 이 모든 것들은 제록스의 유명한 팔로 알토 리서치 센터(PARC)에서 개발됐지만 다른 이들에 의해 실용화됐다.

복사기 업체의 ‘거인’은 이제 종이가 점점 사라지는 세상에서 물속에 잠기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PARC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있어 시발점을 제공했다. 이 중에는 제임스 클라크, 알란 케이, 로버트 멧카프, 그리고 로렌스 테슬러 등이 있다.